안녕하세요, 사무처장으로 상근활동하는 서동규입니다.
활동하면서 처음 남기는 상근자 수첩입니다. 첫 상근자 수첩을 남긴다는 사실이 좀 머쓱합니다. 상근활동을 시작한지 시간이 꽤 되었기 때문입니다. 2022년 11월부터 상근을 시작했으니, 벌써 일년 하고도 반 년 가까이 지났네요. 1년 6개월.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돌아보면 처음 출근한 날의 기억은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상근활동가로서 사는 삶은 처음이었기에 새로운 경험이 꽤나 많았기 때문이겠지요.
그간의 경험과 느낌을 어떻게 공유드릴까 생각하니 머리가 복잡해지더군요. 그래서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가원, 지수 두 동료가 인터뷰를 해줬습니다. 제가 민달팽이를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어떻게 상근활동을 하게 되었는지, 상근하면서 기억에 남는 활동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인터뷰 이후에 제가 다시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재미있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2024년 3월 연세대 인권축제 부스)
Q. 민달팽이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나요?
2016년 가을로 기억해요. 당시에 저는 서울혁신파크 안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황지성 회원과 일하는 공간이 같았어요. 그분이 민달팽이유니온을 아느냐 물어봐서 안다고 했어요. 집에 대한 활동을 하는 단체라는 정도로 알고 있었거든요. 알고있다 했더니 꼭 가입을 하라고 하셨어요. 집에 대한 불만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선뜻 같은 건물 1층에 있던 민달팽이유니온 사무실에 함께 방문해서 가입서를 썼어요.
Q. 집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대학교 1학년 때 대학 입학하자마자 한 달 동안 왕복 3-4시간 통학을 했어요. 이게 도저히 안되겠는거에요. 때마침 동아리 선배들이 같이 살고 있는 집이 있어서 그 집에 같이 살게 되었어요. 집이 엄청 좁긴 했지만 오손도손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이사를 나가야한다는 거에요. 알고보니 그 집이 큰집에 딸린 집이었는데, 큰집의 임대차계약에 종속된 전대차계약으로 살고 있었던 거였어요. 임대차계약이 해지되니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사를 가야했던 거에요. 그렇게 뿔뿔이 흩어졌죠. 급하게 구해서 이사 간 집은 환경이 더 안좋았어요. 좁고, 벌레도 많았고요. 방 밖의 화장실을 5명이서 같이 썼어요. 이런 주거경험이 있었어요.
그때 집이 불편하고 불만족스럽다고는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않았나 싶어요. 그냥 ‘원래 이렇고, 다들 이렇게 살지 뭐’ 같은 마음 말이에요. ‘이것은 사회적인 문제야!’라는 생각은 할 수 있어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찾기 어려웠기 때문에 더욱 그랬고요. 기숙사 건설이 학교 주변 임대인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구청과 학교가 방관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으니까요.
민달팽이유니온을 만나고 나서는 달라졌지요. 당연하게 느껴지는 집 문제가 당연하지 않은 것이며, 그 문제를 같이 해결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Q. 기억에 남는 활동은 무엇이 있나요?
2016년 촛불에 같이 나갔던 것도 기억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달팽이집 7호집 인테리어에요. 저는 이케아 침대를 여러개 조립했었어요. 이층 침대도 있었고 일층 침대도 있었지요. 조립이 재미있었어요. 그리고 뭐라고 해야할까요, 뭔가를 같이 하는 맛이 있었어요. 이 집에 내가 들어와서 살지는 않지만, 우리 중에 누군가가 살게 될 공간을 정성을 들여서 준비한다는 기분이 굉장히 좋았어요.
(열심히 조립한 2층 침대)
Q. 왁자지껄 즐거웠던 기억이 나네요. 좀 건너뛰어서, 왜 상근자가 되신 거에요?
그러게요. 왜 그랬을까요. 그럼 상근자가 되기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겠는데요. 상근자가 되기 전에 민달팽이에서는 민달팽이주택협동조합 이사로 활동했어요. 그리고 더함이라는 회사에서 일하면서 위스테이 협동조합을 만드는 일을 했었고요. 집에도 협동조합에도 관심이 있었기에, “주택협동조합”이 매력적으로 다가왔거든요. 왜냐하면 주택협동조합이라는 게 그냥 법적으로 인정되는 조직의 한 형태가 아니라, 집 문제를 같이 해결하자, 우리의 힘으로 모여서 집을 만들자라는 마음가짐이 굉장히 좋았어요. 각자가 알아서 해결하는 방식도 아니고, ‘원래 저래’ 하면서 어쩔 수 없다고 체념에 빠지지 않고 말이죠. 그래서 주택협동조합 운동에 어떻게든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와중에 집과 도시에 대해서 관심이 더 생겨서 공부를 더 해보자는 마음에 대학원을 갔지요. 뭐라고 할까요. 민달팽이와 주택협동조합이, 집이든 도시든 자신이 살고있는 공간에서 힘을 모아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쟁취하는 활동이기에 좋았는데 말이죠. 그 활동 안에 역할이 다양할 수 있잖아요. 누구는 공부를 할 수도 있고, 누구는 행정조직에 있을 수도 있고, 활동가로 있을 수도 있고 말이죠. 여러 역할을 두고 천천히 생각해볼 수 있는, 그러니까 내가 집을 만드는 운동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를 시간을 두고 고민해보고 싶어서 대학원에 갔어요.
학교 생활을 하던 중에, 동네에 재개발을 추진한다는 현수막이랑 전단지가 막 붙는 거에요. 지금까지 한국에서 있었던 극단적인 집 문제가 바로 코앞까지 왔다는 느낌에, 뭐라도 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재개발은 소유한 사람과 소유하지 않은 사람 사이의 격차가 명징하게 나타나는 사안이잖아요. 동네를 개발하는 과정에 소유한 사람들은 조합을 결성해서 어떤 집을 지을지 결정하는데, 세입자들은 한 마디도 못하고 쫓겨나니까요. 주택협동조합이 집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집을 만들자라고 했던 것 처럼,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서도 집 없는 세입자들이 모여서 우리의 권리와 예산과 주택을 만들어보는 모임을 해보고 싶었어요.
(2022년 5월, 당시 모임 홍보물)
민유 사무국에 “동네에서 모임을 하고 싶다!”했더니 너무 좋다고 해주신 거에요. 그래서 “용달팽이”모임이 생겼고, 저에게 큰 경험이 되었어요. 답답한 마음이 술 먹을 때 하소연에 그치지 않게,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같이 공부하고, 구청에 방문하고,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구청의 답변을 받는 일련의 과정으로 만들었던 경험이 뿌듯하게 남았어요. 원하는 답변을 받지는 못했지만요.
(용달팽이 모임에서 재개발 공람 문서를 보기 위해 구청을 방문했을 때. 우리는 제대로 된 세입자 대책과 세입자들의 의사결정 참여를 보장할 것을 요구했으나, 구청으로부터 재개발은 소유주들의 사업이기 때문에 세입자들이 의견을 낼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용달팽이”가 저를 민달팽이유니온 상근활동으로 이끌었던 큰 계기이지 않나 싶어요. 작지만 세입자를 조직하고 목소리를 모아내서 어떤 방식으로든 싸운 경험이었으니까요. 2층 침대를 조립했던 것 처럼, 같이 공부하고 구청에 의견을 제출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즐겁고 자부심이 생기는 일이었어요.
Q. 그리고 반상근을 시작하자마자 농성장으로 출근하셨지요.
네 맞아요. 제가 상근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내놔라 공공임대” 국회 앞 농성이 시작되었지요. 처음에 공공임대주택 예산이 5조 7천억이나 삭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안이 벙벙했어요. 말이 안되잖아요. 무슨 예산을 갑자기 그렇게 삭감할 수 있나요.
(내놔라 공공임대 농성장. 귀여운 달팽이가 보이는가.)
상근활동도 처음이었지만, 농성도 처음이었어요. 농성을 하면서 ‘싸움터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항상 비장하거나 물리적 충돌이 있지는 않았고, 오히려 즐거운 기억이 많았지만, ‘이게 싸움이다’라는 느낌은 확실했어요. 우리들의 공간을 만들고, 공공임대주택이 필요한 사람들을 모아서 우리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도록 하는 싸움 말예요. 이게 상근활동가로서 첫 활동이었네요.
Q. 그 다음 활동은 전세사기깡통전세 대응이었지요.
네. 상근활동도 사무처장 역할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서 너무나 큰 사건을 마주했고, 그만큼 힘들고 숨가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요. 우리가 보증금을 못 돌려받는 세입자가 많아지고 있다는 상황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었죠. 상담도 하고 사례 접수도 받았으니까요.
그런데 희생자가 발생하고 나서는.. 이게 사람이 죽는 문제라는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믿기 힘들었어요. 열악한 환경이나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돈 때문에 생긴 문제라는게, 그 돈도 생활비가 아니라 금융 때문에, 집이 돈이 되고 금융이 되었기에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 말이에요.
(미추홀구 전세사기 희생자 추모제)
희생자분을 기렸던 추모제가 자주 생각이 나요. 추모사를 했어야 했는데, 추모사를 쓰면서 계속 다짐을 했던 기억도 생각이 나요. 우리가 ‘청년 세입자 당사자 연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데, 동료 청년 세입자가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 크게 다가왔고,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힘쓰는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 민달팽이유니온이 세입자들이 기댈 수 있는 조직이 되어야한다고 다짐했었죠. 다들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Q. 전세사기 특별법 제정 이후에는 청년주거권아카데미와 청년주거권실천단을 준비했죠.
맞아요. 2박 3일동안 진행했던 청년주거권실천단이 참 좋았어요.
(홍대입구역 근처에서 반지하참사 대책을 요구하는 거리선전전 진행. 모두가 발언을 하나씩 했다!)
여러 활동이 있었지만, 홍대입구에 가서 열었던 거리선전전이 가장 인상 깊었어요. 저는 거리선전전을 해본 경험을 한 손에 꼽을 수 있었고, 특히 집회에 모인 사람이 아니라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앞에서 하는 발언은 처음이었어요. 저 말고도 꽤나 많은 참가자들이 처음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래도 다들 잘 하시더라고요.
동료 시민들에게 생각을 전하고 연대를 구하는 일은 중요한 정치잖아요. 딱 그 정치를 함께 한 시간이었어요.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각자의 언어로 말하되, 발신할 메시지를 같이 준비하고 실전에서는 응원을 주고받았잖아요. 당시에 고양되는 느낌을 받았고, 되돌아보면 감동적이에요.
Q. 슬슬 마무리를 하면 좋겠는데요, 회원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모일 자리를 많이 만들게요. 자주 만나요. 집과 세상을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조금씩이라도 바꾸기 위해서, 모여야 뭐가 되지 않겠습니까.
Q. 마지막으로 다음 상근자 수첩을 쓰는 사람에게 질문 하나 하세요.
음.. 사무실을 중심으로 도보 10분 안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궁금하네요.
안녕하세요, 사무처장으로 상근활동하는 서동규입니다.
활동하면서 처음 남기는 상근자 수첩입니다. 첫 상근자 수첩을 남긴다는 사실이 좀 머쓱합니다. 상근활동을 시작한지 시간이 꽤 되었기 때문입니다. 2022년 11월부터 상근을 시작했으니, 벌써 일년 하고도 반 년 가까이 지났네요. 1년 6개월.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돌아보면 처음 출근한 날의 기억은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상근활동가로서 사는 삶은 처음이었기에 새로운 경험이 꽤나 많았기 때문이겠지요.
그간의 경험과 느낌을 어떻게 공유드릴까 생각하니 머리가 복잡해지더군요. 그래서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가원, 지수 두 동료가 인터뷰를 해줬습니다. 제가 민달팽이를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어떻게 상근활동을 하게 되었는지, 상근하면서 기억에 남는 활동은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인터뷰 이후에 제가 다시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재미있게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2024년 3월 연세대 인권축제 부스)
Q. 민달팽이와의 첫 만남을 기억하나요?
2016년 가을로 기억해요. 당시에 저는 서울혁신파크 안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황지성 회원과 일하는 공간이 같았어요. 그분이 민달팽이유니온을 아느냐 물어봐서 안다고 했어요. 집에 대한 활동을 하는 단체라는 정도로 알고 있었거든요. 알고있다 했더니 꼭 가입을 하라고 하셨어요. 집에 대한 불만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선뜻 같은 건물 1층에 있던 민달팽이유니온 사무실에 함께 방문해서 가입서를 썼어요.
Q. 집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을까요?
대학교 1학년 때 대학 입학하자마자 한 달 동안 왕복 3-4시간 통학을 했어요. 이게 도저히 안되겠는거에요. 때마침 동아리 선배들이 같이 살고 있는 집이 있어서 그 집에 같이 살게 되었어요. 집이 엄청 좁긴 했지만 오손도손 재미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이사를 나가야한다는 거에요. 알고보니 그 집이 큰집에 딸린 집이었는데, 큰집의 임대차계약에 종속된 전대차계약으로 살고 있었던 거였어요. 임대차계약이 해지되니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사를 가야했던 거에요. 그렇게 뿔뿔이 흩어졌죠. 급하게 구해서 이사 간 집은 환경이 더 안좋았어요. 좁고, 벌레도 많았고요. 방 밖의 화장실을 5명이서 같이 썼어요. 이런 주거경험이 있었어요.
그때 집이 불편하고 불만족스럽다고는 생각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않았나 싶어요. 그냥 ‘원래 이렇고, 다들 이렇게 살지 뭐’ 같은 마음 말이에요. ‘이것은 사회적인 문제야!’라는 생각은 할 수 있어도,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은 찾기 어려웠기 때문에 더욱 그랬고요. 기숙사 건설이 학교 주변 임대인들의 반대로 무산되고, 구청과 학교가 방관하는 모습을 보기도 했으니까요.
민달팽이유니온을 만나고 나서는 달라졌지요. 당연하게 느껴지는 집 문제가 당연하지 않은 것이며, 그 문제를 같이 해결할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까요.
Q. 기억에 남는 활동은 무엇이 있나요?
2016년 촛불에 같이 나갔던 것도 기억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달팽이집 7호집 인테리어에요. 저는 이케아 침대를 여러개 조립했었어요. 이층 침대도 있었고 일층 침대도 있었지요. 조립이 재미있었어요. 그리고 뭐라고 해야할까요, 뭔가를 같이 하는 맛이 있었어요. 이 집에 내가 들어와서 살지는 않지만, 우리 중에 누군가가 살게 될 공간을 정성을 들여서 준비한다는 기분이 굉장히 좋았어요.
(열심히 조립한 2층 침대)
Q. 왁자지껄 즐거웠던 기억이 나네요. 좀 건너뛰어서, 왜 상근자가 되신 거에요?
그러게요. 왜 그랬을까요. 그럼 상근자가 되기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겠는데요. 상근자가 되기 전에 민달팽이에서는 민달팽이주택협동조합 이사로 활동했어요. 그리고 더함이라는 회사에서 일하면서 위스테이 협동조합을 만드는 일을 했었고요. 집에도 협동조합에도 관심이 있었기에, “주택협동조합”이 매력적으로 다가왔거든요. 왜냐하면 주택협동조합이라는 게 그냥 법적으로 인정되는 조직의 한 형태가 아니라, 집 문제를 같이 해결하자, 우리의 힘으로 모여서 집을 만들자라는 마음가짐이 굉장히 좋았어요. 각자가 알아서 해결하는 방식도 아니고, ‘원래 저래’ 하면서 어쩔 수 없다고 체념에 빠지지 않고 말이죠. 그래서 주택협동조합 운동에 어떻게든 기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러던 와중에 집과 도시에 대해서 관심이 더 생겨서 공부를 더 해보자는 마음에 대학원을 갔지요. 뭐라고 할까요. 민달팽이와 주택협동조합이, 집이든 도시든 자신이 살고있는 공간에서 힘을 모아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쟁취하는 활동이기에 좋았는데 말이죠. 그 활동 안에 역할이 다양할 수 있잖아요. 누구는 공부를 할 수도 있고, 누구는 행정조직에 있을 수도 있고, 활동가로 있을 수도 있고 말이죠. 여러 역할을 두고 천천히 생각해볼 수 있는, 그러니까 내가 집을 만드는 운동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를 시간을 두고 고민해보고 싶어서 대학원에 갔어요.
학교 생활을 하던 중에, 동네에 재개발을 추진한다는 현수막이랑 전단지가 막 붙는 거에요. 지금까지 한국에서 있었던 극단적인 집 문제가 바로 코앞까지 왔다는 느낌에, 뭐라도 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재개발은 소유한 사람과 소유하지 않은 사람 사이의 격차가 명징하게 나타나는 사안이잖아요. 동네를 개발하는 과정에 소유한 사람들은 조합을 결성해서 어떤 집을 지을지 결정하는데, 세입자들은 한 마디도 못하고 쫓겨나니까요. 주택협동조합이 집 없는 사람들이 모여서 집을 만들자라고 했던 것 처럼,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서도 집 없는 세입자들이 모여서 우리의 권리와 예산과 주택을 만들어보는 모임을 해보고 싶었어요.
(2022년 5월, 당시 모임 홍보물)
민유 사무국에 “동네에서 모임을 하고 싶다!”했더니 너무 좋다고 해주신 거에요. 그래서 “용달팽이”모임이 생겼고, 저에게 큰 경험이 되었어요. 답답한 마음이 술 먹을 때 하소연에 그치지 않게,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같이 공부하고, 구청에 방문하고,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구청의 답변을 받는 일련의 과정으로 만들었던 경험이 뿌듯하게 남았어요. 원하는 답변을 받지는 못했지만요.
(용달팽이 모임에서 재개발 공람 문서를 보기 위해 구청을 방문했을 때. 우리는 제대로 된 세입자 대책과 세입자들의 의사결정 참여를 보장할 것을 요구했으나, 구청으로부터 재개발은 소유주들의 사업이기 때문에 세입자들이 의견을 낼 수 없다는 답변을 받았다.)
“용달팽이”가 저를 민달팽이유니온 상근활동으로 이끌었던 큰 계기이지 않나 싶어요. 작지만 세입자를 조직하고 목소리를 모아내서 어떤 방식으로든 싸운 경험이었으니까요. 2층 침대를 조립했던 것 처럼, 같이 공부하고 구청에 의견을 제출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즐겁고 자부심이 생기는 일이었어요.
Q. 그리고 반상근을 시작하자마자 농성장으로 출근하셨지요.
네 맞아요. 제가 상근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내놔라 공공임대” 국회 앞 농성이 시작되었지요. 처음에 공공임대주택 예산이 5조 7천억이나 삭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안이 벙벙했어요. 말이 안되잖아요. 무슨 예산을 갑자기 그렇게 삭감할 수 있나요.
(내놔라 공공임대 농성장. 귀여운 달팽이가 보이는가.)
상근활동도 처음이었지만, 농성도 처음이었어요. 농성을 하면서 ‘싸움터에 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항상 비장하거나 물리적 충돌이 있지는 않았고, 오히려 즐거운 기억이 많았지만, ‘이게 싸움이다’라는 느낌은 확실했어요. 우리들의 공간을 만들고, 공공임대주택이 필요한 사람들을 모아서 우리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도록 하는 싸움 말예요. 이게 상근활동가로서 첫 활동이었네요.
Q. 그 다음 활동은 전세사기깡통전세 대응이었지요.
네. 상근활동도 사무처장 역할도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서 너무나 큰 사건을 마주했고, 그만큼 힘들고 숨가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요. 우리가 보증금을 못 돌려받는 세입자가 많아지고 있다는 상황을 모르고 있지는 않았었죠. 상담도 하고 사례 접수도 받았으니까요.
그런데 희생자가 발생하고 나서는.. 이게 사람이 죽는 문제라는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믿기 힘들었어요. 열악한 환경이나 물리적 폭력이 아니라 돈 때문에 생긴 문제라는게, 그 돈도 생활비가 아니라 금융 때문에, 집이 돈이 되고 금융이 되었기에 사람이 죽었다는 것이 말이에요.
(미추홀구 전세사기 희생자 추모제)
희생자분을 기렸던 추모제가 자주 생각이 나요. 추모사를 했어야 했는데, 추모사를 쓰면서 계속 다짐을 했던 기억도 생각이 나요. 우리가 ‘청년 세입자 당사자 연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데, 동료 청년 세입자가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이 크게 다가왔고,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힘쓰는 단체를 만들어야 한다, 민달팽이유니온이 세입자들이 기댈 수 있는 조직이 되어야한다고 다짐했었죠. 다들 같은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Q. 전세사기 특별법 제정 이후에는 청년주거권아카데미와 청년주거권실천단을 준비했죠.
맞아요. 2박 3일동안 진행했던 청년주거권실천단이 참 좋았어요.
(홍대입구역 근처에서 반지하참사 대책을 요구하는 거리선전전 진행. 모두가 발언을 하나씩 했다!)
여러 활동이 있었지만, 홍대입구에 가서 열었던 거리선전전이 가장 인상 깊었어요. 저는 거리선전전을 해본 경험을 한 손에 꼽을 수 있었고, 특히 집회에 모인 사람이 아니라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앞에서 하는 발언은 처음이었어요. 저 말고도 꽤나 많은 참가자들이 처음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래도 다들 잘 하시더라고요.
동료 시민들에게 생각을 전하고 연대를 구하는 일은 중요한 정치잖아요. 딱 그 정치를 함께 한 시간이었어요. 각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각자의 언어로 말하되, 발신할 메시지를 같이 준비하고 실전에서는 응원을 주고받았잖아요. 당시에 고양되는 느낌을 받았고, 되돌아보면 감동적이에요.
Q. 슬슬 마무리를 하면 좋겠는데요, 회원분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모일 자리를 많이 만들게요. 자주 만나요. 집과 세상을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조금씩이라도 바꾸기 위해서, 모여야 뭐가 되지 않겠습니까.
Q. 마지막으로 다음 상근자 수첩을 쓰는 사람에게 질문 하나 하세요.
음.. 사무실을 중심으로 도보 10분 안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