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용산을 반복하게 하는가
민달팽이유니온 김경서
지난 1월 20일, 용산참사 9주기를 맞아 용산참사 추모위원회에서는 <공동정범>을 상영했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그날을 기억하며 사람들은 영화를 관람했다. 9년 전 1월 20일, 남일당 건물에서 점거농성을 벌이던 철거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특공대와 용역업체 직원들이 동원되었다. 수위 높은 진압이 강행되었고, 불이 났고, 6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진상규명 중이라고 하지만 폭력 진압이 사태를 참혹히 끌고 갔다는 사실은 대부분 부정하지 못한다.
김석기 국토위 배정
대부분 부정하지 못하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이번 20대 국회에서 국토교통위원회(이하 국토위)에 배정된 김석기 의원이다. 국토위는 주택, 건설, 철도, 항공 등 국토와 교통에 관련된 정책 전반의 기획을 마련하는 상임위다. 당연히 용산 참사와 가장 밀접할 수밖에 없으며 또 다른 용산을 방지하고 근본적인 원인을 규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 상임위란, 특정 정책분야에 속하는 법안을 심의 및 의결하는 기관이다. 따라서 각 상임위에 배정받은 위원들은 해당 분야에 보다 전문적이라는 기본 전제가 있다. 그리고 김석기는 용산참사 책임자이자 사건 당시 진압 작전을 총괄한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이다. 그는 사건 이후 오사카 총영사, 한국공항공사 사장, 국회의원을 거치며 단 한 번도 용산참사의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다. 이처럼 기본적인 정보의 나열만으로도 김석기가 국토위에 배정된 현실이 왜 모순적인지 알 수 있다.
“의장과 교섭단체 대표의원은 의원을 상임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임하는 것이 공정을 기할 수 없는 뚜렷한 사유가 있다고 인정할 때에는 해당 상임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임하거나 선임을 요청해서는 안 된다.” - 국회법 48조 7항
|
구조적으로 소외되는 용산
용산은 단순한 과잉진압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과 국가권력이 결탁한 결과였다. 용산 뉴타운 재개발 사업에는 28조원이라는 이익이 걸려 있었다. 이익추구가 본질인 자본에게 사람은 중요하지 않았고 세입자들은 그 모든 추진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경제성장의 동력을 부동산 시장에 떠넘기는 국가, 끊임없이 커지는 대기업과 건설자본, 쫓겨나는 사람들, 그것을 외면하는 국가. 용산은 이 악순환의 단면이다.
따라서 김석기는 전문성과 공정성, 두 가지 차원에서 모두 자격미달이다. 그는 국토위원으로서의 전문성을 갖춘 바가 없으며 용산참사의 총책임자이자 가해자의 위치에 있다. 나아가 그는 국가권력을 앞세워 자본을 껴안은, 일종의 상징과도 같은 사람이다. 그런 그가 국토위에 배정받았다는 사실은 작게는 현 원내 교섭단체, 크게는 현 국회가 용산에 대해, 토지에 대해,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준다.
용산참사를 소외시키는 건 국회뿐만이 아니다. 얼마전 박원순 시장은 여의도와 용산을 중심으로 서울 전반의 재개발 계획을 수립하겠다고 발표했다. 여의도를 뉴욕 맨해튼처럼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였다. 사람이 머무르는 공간이 투기가 되는 현실에 대한 해결책 없이 대규모 재개발을 추진하는 것은 서울이라는 도시공간을 자본의 손에 넘기는 꼴이다. 실제로 박원순 시장의 발표가 있은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여의도 땅값은 2억이 넘게 상승했다. 용산4구역은 2016년부터 효성그룹에 손에 넘어가 개발되고 있다. 9년이 지난 지금도 변하지 않은 것들이 많다. 이렇게 모든 톱니가 공고하게 합을 맞추며 용산을 소외시키고 있다. 용산을 반복케 한다.
반복되는 용산을 맞이하는 우리의 태도
사람이 설 자리는 화폐가 되었다. 설 데가 없어 화폐의 자리에 선 사람들은 다리에 못이 박히거나 손가락이 잘리거나 죽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여전히 많은 이들이 같은 원인에서 비롯된 절망을 겪는다. 남루한 골목을 지날 때면 종종 붉은 글씨로 적힌 문구를 볼 수 있다. 여기 사람이 있다, 고 적힌 붉은 글씨들은 대체로 이지러져 있다. 몇십번 몇백번 쓰여졌을 낡고 더럽혀진 글씨들. 옆에는 대체로 욕설이 쓰여져 있다. 놀랍지 않은 일이다.
놀랍지 않은 이유는 저것이 우리 세대의 현재이자 미래이기 때문이다. 청년문제는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집약되어 발생하며, 청년주거문제 역시 뿌리깊은 부동산 투기, 세계화된 금융자본주의, 개인화된 불평등 등의 구조적 문제로부터 발생한다. 이처럼 현재의 청년 세대 또한 시스템의 일부분이므로 우리의 해결책이 하늘에서 솟아날 수는 없다. 빈곤의 세대화 문제가 21세기적인 특수성을 지니지만 그 원인은 여타의 사회적 문제의 원인과 일치하듯이 말이다. 결국 우리의 싸움은 구체적이고 세밀한 정책 혹은 사업을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그 배경에는 구조적 전환이 필수적이다. 신자유주의가 뼈에 박힌 이 시대의 운동이란 결국 자본에 맞서는 것이고 자본과의 싸움은 분명 허탈한 데가 있다. 쉐도우복싱도 아닌 것이 참으로 손에 닿질 않는다.
<거룩한 분노>라는, 전혀 다른 주제를 다룬 그러나 또 그렇게 다르지만은 않은 영화가 있다. 스위스 여성참정권 운동의 역사를 나름 코믹하고 유쾌하게 풀어낸 영화인데 어떤 이는 우습게도 이걸 보며 울었다고 한다. 웃으면서 울었다고 한다. 승리의 감정이 너무나 즐거워서, 자신에게는 승리의 역사가 없어서, 웃으면서 울었다고 한다. 다른 운동 진영의 이야기이지만 누구나 아는 감정이다.
승리란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신기루와 같다. 아니 그래야 한다, 우리의 승리는 매순간 갱신되어야 하므로, 도달하는 순간 그것은 승리가 아니게 되므로. 그럼에도 우리는 그곳을 향해서 간다.
무엇이 용산을 반복하게 하는가
민달팽이유니온 김경서
지난 1월 20일, 용산참사 9주기를 맞아 용산참사 추모위원회에서는 <공동정범>을 상영했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그날을 기억하며 사람들은 영화를 관람했다. 9년 전 1월 20일, 남일당 건물에서 점거농성을 벌이던 철거민들을 진압하기 위해 경찰특공대와 용역업체 직원들이 동원되었다. 수위 높은 진압이 강행되었고, 불이 났고, 6명의 사람들이 죽었다. 진상규명 중이라고 하지만 폭력 진압이 사태를 참혹히 끌고 갔다는 사실은 대부분 부정하지 못한다.
김석기 국토위 배정
대부분 부정하지 못하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 중 하나가 바로 이번 20대 국회에서 국토교통위원회(이하 국토위)에 배정된 김석기 의원이다. 국토위는 주택, 건설, 철도, 항공 등 국토와 교통에 관련된 정책 전반의 기획을 마련하는 상임위다. 당연히 용산 참사와 가장 밀접할 수밖에 없으며 또 다른 용산을 방지하고 근본적인 원인을 규명해야 할 책임이 있다. 상임위란, 특정 정책분야에 속하는 법안을 심의 및 의결하는 기관이다. 따라서 각 상임위에 배정받은 위원들은 해당 분야에 보다 전문적이라는 기본 전제가 있다. 그리고 김석기는 용산참사 책임자이자 사건 당시 진압 작전을 총괄한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이다. 그는 사건 이후 오사카 총영사, 한국공항공사 사장, 국회의원을 거치며 단 한 번도 용산참사의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다. 이처럼 기본적인 정보의 나열만으로도 김석기가 국토위에 배정된 현실이 왜 모순적인지 알 수 있다.
구조적으로 소외되는 용산
용산은 단순한 과잉진압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과 국가권력이 결탁한 결과였다. 용산 뉴타운 재개발 사업에는 28조원이라는 이익이 걸려 있었다. 이익추구가 본질인 자본에게 사람은 중요하지 않았고 세입자들은 그 모든 추진 과정에서 배제되었다. 경제성장의 동력을 부동산 시장에 떠넘기는 국가, 끊임없이 커지는 대기업과 건설자본, 쫓겨나는 사람들, 그것을 외면하는 국가. 용산은 이 악순환의 단면이다.
따라서 김석기는 전문성과 공정성, 두 가지 차원에서 모두 자격미달이다. 그는 국토위원으로서의 전문성을 갖춘 바가 없으며 용산참사의 총책임자이자 가해자의 위치에 있다. 나아가 그는 국가권력을 앞세워 자본을 껴안은, 일종의 상징과도 같은 사람이다. 그런 그가 국토위에 배정받았다는 사실은 작게는 현 원내 교섭단체, 크게는 현 국회가 용산에 대해, 토지에 대해,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준다.
용산참사를 소외시키는 건 국회뿐만이 아니다. 얼마전 박원순 시장은 여의도와 용산을 중심으로 서울 전반의 재개발 계획을 수립하겠다고 발표했다. 여의도를 뉴욕 맨해튼처럼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였다. 사람이 머무르는 공간이 투기가 되는 현실에 대한 해결책 없이 대규모 재개발을 추진하는 것은 서울이라는 도시공간을 자본의 손에 넘기는 꼴이다. 실제로 박원순 시장의 발표가 있은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여의도 땅값은 2억이 넘게 상승했다. 용산4구역은 2016년부터 효성그룹에 손에 넘어가 개발되고 있다. 9년이 지난 지금도 변하지 않은 것들이 많다. 이렇게 모든 톱니가 공고하게 합을 맞추며 용산을 소외시키고 있다. 용산을 반복케 한다.
반복되는 용산을 맞이하는 우리의 태도
사람이 설 자리는 화폐가 되었다. 설 데가 없어 화폐의 자리에 선 사람들은 다리에 못이 박히거나 손가락이 잘리거나 죽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여전히 많은 이들이 같은 원인에서 비롯된 절망을 겪는다. 남루한 골목을 지날 때면 종종 붉은 글씨로 적힌 문구를 볼 수 있다. 여기 사람이 있다, 고 적힌 붉은 글씨들은 대체로 이지러져 있다. 몇십번 몇백번 쓰여졌을 낡고 더럽혀진 글씨들. 옆에는 대체로 욕설이 쓰여져 있다. 놀랍지 않은 일이다.
놀랍지 않은 이유는 저것이 우리 세대의 현재이자 미래이기 때문이다. 청년문제는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집약되어 발생하며, 청년주거문제 역시 뿌리깊은 부동산 투기, 세계화된 금융자본주의, 개인화된 불평등 등의 구조적 문제로부터 발생한다. 이처럼 현재의 청년 세대 또한 시스템의 일부분이므로 우리의 해결책이 하늘에서 솟아날 수는 없다. 빈곤의 세대화 문제가 21세기적인 특수성을 지니지만 그 원인은 여타의 사회적 문제의 원인과 일치하듯이 말이다. 결국 우리의 싸움은 구체적이고 세밀한 정책 혹은 사업을 필요로 하지만 동시에 그 배경에는 구조적 전환이 필수적이다. 신자유주의가 뼈에 박힌 이 시대의 운동이란 결국 자본에 맞서는 것이고 자본과의 싸움은 분명 허탈한 데가 있다. 쉐도우복싱도 아닌 것이 참으로 손에 닿질 않는다.
<거룩한 분노>라는, 전혀 다른 주제를 다룬 그러나 또 그렇게 다르지만은 않은 영화가 있다. 스위스 여성참정권 운동의 역사를 나름 코믹하고 유쾌하게 풀어낸 영화인데 어떤 이는 우습게도 이걸 보며 울었다고 한다. 웃으면서 울었다고 한다. 승리의 감정이 너무나 즐거워서, 자신에게는 승리의 역사가 없어서, 웃으면서 울었다고 한다. 다른 운동 진영의 이야기이지만 누구나 아는 감정이다.
승리란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 신기루와 같다. 아니 그래야 한다, 우리의 승리는 매순간 갱신되어야 하므로, 도달하는 순간 그것은 승리가 아니게 되므로. 그럼에도 우리는 그곳을 향해서 간다.